수필가 이태식(LEE TAE SIK),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수필가 이태식(LEE TAE SIK)

푸른문학 수필가 이태식(LEE TAE SIK),정의란 무엇인가?

입력시간 : 2019-03-04 19:46:26 , 최종수정 : 2019-03-04 19:46:26, 푸른문학신문 기자


 

조직 안에서만 살면 그 조직 속의 룰이 바로 정의인줄 착각하고 그게 또 세상의 전부인 것으로 여겨 모든 것의 기준으로 삼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선로에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한 기관사가 급제동을 하면 열차가 탈선하여 대형 참사로 이어질 것을 판단한 기관사는 아마 매뉴얼에 따라 다수를 살리기 위해 소를 희생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그렇게 하라고 매뉴얼이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조직이 요구하는 매뉴얼에 따른 것이다. 조직 속에서 영향을 받은 대로 그는 행동한다. 행동한다기보다 차라리 조직의 한 자원으로 같이 매뉴얼에 포함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한나 아렌트가 지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같은 것이다. 자기의 생각은 사라지고 그 조직의 룰에 따라 기계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조직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 행동하기 위해서 인간은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아이히만은 자기의 뜻이 아니라 조직의 이름으로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사람을 고문해 죽였다. 그는 성실하고도 묵묵히 조직의 명령을 수행한 죄밖에 없다고 최후 진술하여 무죄를 주장했지만 인간으로서 생각 없이 행동했다는 죄명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인간으로 태어나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도 죄라는 것이다. 왜냐면 인간=생각이라는 공식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생각이라는 것은 인간만이 지닌, 인간이 다른 것과 구별되는 유일한 것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는 생각 없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라는 말과 같다. 인간들이 주장하는 정의도 생각 없는 인간들에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정의는 곧 생각하는 인간이 양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만 강조하면 인간성이 사라진다. 법에 의해서만 사람을 단죄하면 법의 테두리에서만 사람들은 움직인다.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 다닌다. 법만 강조하면 자유가 훼손된다. 정의와 법과 원칙만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자본주의에서 돈 있는 강자만 좋아진다. 그들만 살아남게 된다. 왜냐면 사실 법이라는 것은 재산을 강압적인 힘으로 취득한 자들이 자기가 가진 재산을 지키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법과 정의만 내세우고 지키려고 하면 자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어찌 보면 정의는 기존 틀인 것이다. 이 틀은 자유와 우리의 운신을 옥죈다. 대법원 정문에도 정의만 새겨져 있지 않고 자유도 함께 새겨져 있다. 서로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말고 조화를 이루라는 말이다. 또 정의만 내세우면 인간의 최대 특징인 창조성이 사라진다. 서로의 조화가 중요하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전환으로 반대가 많았다. 그것은 비정규직은 자기들이 들어온 방식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그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이것도 어찌 보면 기득권 수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도 나름으로 새로운 방식을 적용하여 정규직이 된 사람들이다. 마치 성골 진골 나누듯이 같이 어울리지 않는 것은 정의만 내세우고 조화나 자유로움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다 자기 중심적이다. 만약 자신이 그들 입장이라면 그렇게 기득권을 주장할 수 있을까. 인간이 사는 사회는 과학처럼 딱 떨어지는 게 아니고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존재한다.

인간 사회는 한 가지 기준에 의해서만 움직이지 않는다. 정의만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하면 나는 정의롭지만 너는 그렇지 않고가 되어 결국 정의로운 자와 아닌 자가 대립하게 된다. 여기서 정의롭지 않은 자로 분류된 자도 그렇게 우리가 사회 사회에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는 다른 차원에서 쓸모 있는 자일 수 있다. 그는 아이들이나 이웃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자일 수 있다. 그가 단지 횡단보도를 무단횡단해서 법을 어겼기 때문에 정의롭지 않은 자로 분류되었을 수도 있다. 인간은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복잡한 동물이다. ‘이거다라고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다. 그 때는 비트게슈타인 식으로 침묵해야 한다.

세상은 모순과 부조리가 항상 인간과 같이 행진하고 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정의나 이상을 만들어 그것을 향해 계속 나아가는 존재다. 그것을 현실 속에서 완전히 실현하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으니 미리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고 그것을 이상으로 여기고 계속 추구해 가야 한다는 말이다. 현실이 모순투성이고 정의가 바닥을 쳐도 우리 인간은 정의와 이상을 향해 나아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실행은 불가능하더라도 정의는 인간 세상에서 상징적인 기준으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의 의무는 인간 세상의 질서 부여다.

모순 속에서 절망적이지만 거듭 반복되는 영원회귀의 시시포스처럼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꼭대기로 다시 밀어 올려야 한다. 영원히 반복되는 걸음이라도 그 무한 반복의 한 걸음을 새롭게 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도 우리 인간의 숙제인 것이다. 반복되는 새로운 걸음 속에서 우린 앙리 베르그송의 생의 도약을 경험하는 순간을 언젠가는 맛볼 것이다. 그런 도약은 자기 속에 혁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뿌리 채 흔들어놓는 운명의 물줄기를 틀어 거꾸로 치솟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체적으로 사는 온전한 자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기도 하다. 생각의 폭풍을 만나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다.

 

나는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자기에게 유리한 틀을 벗어던진 사람들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목사의 아들이지만 신을 부정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도 왕자이지만 그것을 벗어던지고 깨달음의 고행 속으로 몸을 던졌다. 어쩌면 그들이 가지고 있던 틀이 그들에게 유리한 것으로 작용한 곳이 아니라 장애물로 작용하여 그들은 그것들을 박살냈을 것이다. 그들이 생각을 거듭하니 생각의 폭을 제한하는 게 그것(종교, 왕좌)이어서 그것을 걷어치웠을 것이다.

기존 틀을 과감히 벗어던진 니체는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와 자신이 가진 것을 실현하는데 있어 도움이 되는 것은 정의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불의라고 했다. 인간은 완전하지 못한 존재이고 그 수명이 유한하므로 자기 것을 실현하는 데만도 사실 시간이 부족하다. 자기 것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정의로 여겨, 정의를 지키고 자기 삶을 잘 살아 보는 게 어떻겠는가.





[푸른문학신문 편집국 지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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